'촉'에 해당되는 글 36

  1. 2018.03.11 손을 내밀어 허공에
  2. 2018.03.11 잘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3. 2018.03.11 다시, 바람이다
  4. 2018.03.11 슬픔
  5. 2018.03.11 들은 이야기
  6. 2018.03.10 명암
  7. 2018.03.10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8. 2018.03.09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9. 2018.03.09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10. 2018.03.09 감기를 마치고

손을 내밀어 허공에

2010년



손을 내밀어 허공에



죽은 그 아이를 위한 노래는 무엇인가,라고

(말러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보처럼 생각했다. (바보,는 근사한 표현이지 싶다.)

죽음에 음악따위 어울리지 않아…


나의 장례식에 울려퍼질 음악을 생각해본다.

(장례식조차 취소해버리면 모를까.)

(쇼팽을 더 잘 쳤던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쇼팽이 아닌 슈베르트의 5중주를 선곡했다.)



17년 전, 서울 이태원의 회사 근처로 대학교 후배 

기주가 찾아왔다.

서울에서의 만남이 반가웠다.

(우리는 대구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고 오랜만에 만난 거였다.)

기주는 졸업 후 인천교대에 편입했다고 했다.

(기주는 史學科를 다녔었다.)


철학을 전공한 나는 사학과의 강의를 

몇 가지 들었고 기주와 함께 한두 번의 

유적답사를 간 적이 있었다.

기주가 어떤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길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그 친구가 죽었단다.

설암(舌癌)으로 죽었다했다.

그런데 기주는 내가 그 친구를 잘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게다가 나의 과후배라고...

혹시 그 아이 내가 아는 아이야?

선배랑 친했잖아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이름조차도.

그 아이, 눈감기 직전에 선배에게 남긴 말이 있어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너무나 이상하다 했다.

사람들도 이상하다 했다.

사람들은 철학과 학생 중 사학과 수업을 함께 듣는 두 사람으로 

그 아이와 나를 기억했다.

- 며칠 전 신문에서 아마도 그 아이와 내가 들었던 그 수업의

교수님(노중국 교수)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한 쌍으로 묶여 있었다.


Schubert: 4 Impromptus D899 & D935

Maria João Pires


즉흥곡은 즉흥적이지 않다.

(즉흥곡이란 제목은 출판업자가 붙였다.

누군가는 네 개의 즉흥곡이 하나의 소나타라고 짐작했다.)


피레스의 연주에는 슈베르트 자신에 대한 애닯음과

죽어버린 베토벤에 대한 흠모가 함께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만 같다.

피레스는 슈베르트와 잘 어울린다.


그나저나 이 슬픈 가락을 어찌할거나.

그 아이에게 어울릴까, 물어도 되는 건가.

누가 들을 것인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족하다.



잘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나흘간의 촬영 마지막 테이크, 2017년



잘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7월 8일. 

몽블랑의 특별판 청록색 잉크를 베트남 하노이의

한 대형마트에서 사온 몇 천원짜리 만년필에 넣고서 

이것저것 적어보는데…

      번진다.

굵은 획들이 지저분하다.

다른 노트에도 써보고, 다른 만년필로 바꿔서도 써보지만

      장마다.


이쯤에서 '마음의 장마' 같은 소릴 하면 

뻔하게 들리겠지만, 해야만 한다.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합일하는 경지야말로 

좋은 카피라고 믿고 있으니까.

      몸과 마음의 소화, 훼스탈 



*

물경(勿驚), 사랑이다.

바흐가 사랑놀음처럼 들린다. 특히 알라망드가 그렇다.

이건 마이나르디의 두 번째 녹음 때문인 것 같다.


Bach: Cello Suite

Enrico Mainardi, 1963년


프랑스 영화 한 편을 아주 감명깊게 보았다.


Je Vais Bien, ne T’en fais pas.

잘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평점은 낮은 영화였다. 

남매간의 우애에 대한 영화적 장치가 거의 전부다.

하지만 제목이 끝내준다. 그리고 사실 영화도 좋았다. 

제목의 여운에 마음이 움직여, 

첼로수트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지? 하며

나는 나에게 말문을 텄다.



*

1993년 겨울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LP를 

가지게 되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대구백화점 음반코너에서 발견한 파란색 박스!

두툼한 박스에 매끈한 해설집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새물건에서 나는 독특한 그 냄새…

바흐의 LP, 카잘스의 LP - 모두 어감이 좋은 말이었다.

라이센스 LP였지만 흔히 보던 디자인의 박스가 아니었고, 

[독일스탬프사용]이라는 스티커가 

큼직하게 붙은 새로운 라이센스LP였다.

낡은 턴테이블에 조심조심 1/2번 모음곡을 얹어놓았다.

엣지가 상한 스피커였지만 소리는 잘도 났다.

석 장을 모두 듣고 아주 유치한 문구를 

LP박스의 안쪽면에 메모했다.

(조금 전에도 확인했다.)

 

K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몸이 마른 편이었고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다.

해가 쨍한 겨울날 함께 경주에 갔다. 

감은사지 부근에 도착했을 때엔

쨍한 해는 찾아볼 수 없었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문무왕의 산골처 앞 해변에는 무당이 

그의 신딸과 함께 제를 드리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라 기원을 위해 준비한 초는 

나룻배 밑에 소중히 모셔져 있었다.

어둑어둑한 바닷가에 그 초의 불빛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K에게 카잘스의 LP를 빌려주고 돌아오던 길.

1시간 정도를 걸어오면서 보이는 공중전화마다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오빠가 받았다.

누나를 바꿔주세요.

전화를 받는 K의 음성 뒤로 2번 모음곡의 

프렐류드가 흐르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나를 사랑해?, 얼마나 기다려줄거야?

나는 마구 지껄여댔다.(K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다.)


어떤 연유로 그 LP가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카잘스의 LP는 

거실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당연하게도 K는 돌아오지 않았다.(사실 떠나지도 않았지.)

아… 박스 안쪽의 메모를 열어보려면 나는 머뭇거려야 한다.

K... 실루엣은 기억나지만 그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

사랑은 기준이다. 

그래서 탐구되고 치환되고 반동의 결과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 감정의 결이 변해간다.

추억, 회한, 기억, 흔적에서 망각으로.

가끔은 잊혀짐을 끄집어 내는 역행을 하는 것이다.

시간을 뒤집는 거다.

넌 어떤 사람이냐, 물었더니 입을 다물고 

주머니 속 물건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낸다.

바흐가 추억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비슷한 추억이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





다시, 바람이다


다시바람이다



깜깜한  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몸도 씻고 베갤 들고 거실로 나와서는 

거의 저절로 황동규 선생의 전집을 펴들고 

풍장 3부를 읽었더랬다. 

 곱고도 진솔해서 우아한 글이다. 

자꾸만 자꾸만 황선생의 시를 해설해주시던 

우리선생님의 눈동자가 생각나고 

한껏 반들반들 쓸어올린 시인의

머리칼이 밤공기를 맴돈다.


요즘 베스트셀러들은 수필이 많더라.

읽다보면 문법적 오류 때문에 위축되는 문장들이 많다.

그래놓고선경계할 일이다따위를 덧붙이는  

아주 별루다.


알고보면사유의 합리화가 얼마나 유령처럼 

스멀거리고 다니는지.

게다가 스스로  생각들의 간극을 느끼는 것만 같다.

부연과 부기가 너무나 지루했다.

그러고보면詩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황동규: 풍장

1983년


근래에 날씨가 이상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이상하다.

오늘 아침은바람이다.

밤사이 불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피곤이 가신다. 

      종종 그런 기분을 느낀다.


바람을 보면서 창을 열었다.

거리로 나와 바람을 느끼면서, 

등등의 하루를 보내면서

머리 속엔 황동규 선생의 [풍장] 머물렀다.

풍장의 기원을 찾아들어가기보다는, 

세상살이로서의 풍장을 상상해 본다.

화장이나 수목장처럼 직접적이지 않은 

표현이다풍장은.

정말이지풍장은 인생스럽다.

인생의 뒤끝이면서도.


선생이 비유한 세계는 사실   바가 아니다.

나는 다만,

비유  자체에 대해 의미부여를 한다.

일종의 대유인 것도 같다.

돌담을 쌓다보면 제각기 생긴 돌들이 담이 된다.

      저걸 어찌 쌓는담?

하지만 맞아들어간다모든 돌들이.

生에도 모든 것들을 가져다댈  있다.

생은 또한모든 것이니까.

그래서 비유는 아름다워야한다.

그리하여 시가 되는 것이고.

이런 시를 설명하는 것은 어쩔  없이

부사와 관계사가 자꾸만 들어가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품사들은 하릴없이 바람이 된다.

나는 지극히 부사 같은 존재이다.

바람으로 쌓는 그러나 부사이다.




슬픔

홈플러스에서 사온 키트로 그린 눈물, 2018년




슬픔



언젠가 작은 프로젝터를 구해다 거실에 두고서

말그대로 공중파를 잡아 EBS 채널을 가끔 보았다. 

오늘 - 2018년의 3월 10일 자정을 5분 남기고 

빔을 켰다.


Kenneth Lonergan: Manchester By the Sea

2016년


멋진 음악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경찰서에서 증언하고 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였을 것이다. 

영화는 중반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의 후반부만 보았다.


*

미국 같지 않은 미국이 펼쳐졌다. 

이미 이 영화를 본 그녀가 전반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주인공 '리'는 딸 둘을 잃었다.

자신의 실수로 딸들이 화재로 죽었다. 

'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슬프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거기까지가 전반부였다. 

형이 죽는다. 

조카와의 동행이 시작된다. 

여전히 슬프다.

그는 여전히 슬프면서 여전히 살아간다.

카메라는 관찰하면서, 

끝내 관찰하면서 슬픔을 지켜본다.

슬픔은 깊어진다. 

아득해진다. 

슬픔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슬픔은 본래 그렇다.


*

영화가 물어왔다. 

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지점은 어디인가?

나는 답한다.

나쁜 꿈을 꾸었던 날 새벽 3시 부근이라고.


가끔, 아주 가끔 슬픔이 슬픔답지 않다는 

역설이 만들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나쁜 꿈이란 

현실이기 때문이다. 




들은 이야기

Berlin, 2015년




들은 이야기



작가인 설터는 파티에 갔다가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남편이 아내의 자살을 도왔는데 어쩌다 일이 잘못되어

      다음 날 자살한 아내가 이층에서 걸어 내려왔다는 

      얘기였어요.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내려와 남편과 

      새 여자친구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했어요. 

      이 얘기 속의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등장인물은 모두 상상한 거예요. 


제임스 설터: 어젯밤

마음산책, 2010년


나의 TV-CM 입봉작은 형으로부터 들은 한 토막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한 토막이었지만 살을 붙여나가서는 다시 슬림하게 만드는 과정 -

그렇게 TV-CM이 탄생했다.

      서점에서 책을 찢는 여자를 봤다,는 게 전부였다. 

      여기에 살을 붙여 나가서 -

      서점에서 물기 어린 여자를 잡지에서 본 

      여주인공(김민희였다.)이 그 면을 찢으면서 

      '왜 너만 촉촉한 거야?'하면 

      찢어지는 종이에서 물이 튄다는

      그런 설정과 구성이 되었다.

      [수분더하기 엔시아 티플러스, 코리아나화장품]


그리고 단편소설 중 가운데 (물론 미발표작) '칸타타'는

강남역 뒷편 두 군데의 막창집 중 한 곳에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심지어 옆 테이블의 이야기였다.

또 다른 TV-CM 하나는, 어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로부터 만들었다.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에 실린 작가의 편지(역자에게 보내는)를 보면 

어젯밤,에 실린 단편 어젯밤은 파티에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들은 이야기와 소설의 다른 점은 물론 세부에 있다. 결말을 보면,

남편과 새 여자친구는 영영 헤어진다. 새 여자친구는 남편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작가의 작가적 몫이었다.)

이런 경우가 분명 있다. 아니, 많을 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의 이야기 말고는 모두 이렇게 알게 된 이야기들이다.


크리에이티브 아이디어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상상보다는 말야, 듣고나서 상상하는 게 더 재밌잖아.

단어를 남발하면 이상한 사람이지만 단어의 끝을 잡고 

말끝잇기를 하면 재치있는 사람인 거지.

스토리텔링도 좋은데 스토리리스닝도 좋아.

그러니 말하기 전에, 일단 듣자구요.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나 동료의 이야기를 잘 듣기만 해도 멋진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때가 있다고. 하긴 잘 듣는 게 어렵기는 합니다.)


명암

Gothenburg, 2015년




명암 



      Meiner geliebten Marianne

      - der (?...) Frau mit kleinen Fehlern

      auch Beethovens Werke waren nicht

      alle vollkommen

      23. 24/Oktober 1974

      Dein Peter

      나의 사랑하는 마리안네에게

      - 자잘한 결점이 있는 여성에게

      베토벤의 작품도 모두 완전하지는 않았어요.

1974 10 23/24

당신의 페터가


아마도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중고 LP를 샀더니 LP 박스 안쪽에 

적혀있던 메모라고 한다. (고클래식 게시판에서 보았던 것)



*

후배 쑥이 무등산에 올랐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쑥에게 알려주었다는 건데.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과연 그렇다.

경북 안동에 가서 돌담을 유심히 바라봐.

굳이 그럴 것 없이 주변의 커플들을 보든가.

세상 모든 것은 다 맞아들어간다. 

그 제각기 생긴 돌 조차도 맞아들어가 

반듯한 담벼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조화로운 그것들이 각기 명과 암이고,

서로가 명이 되고 암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카피도 없다.

그림이 기가막히게 좋으면 카피는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다.

베토벤 정말 까칠한 사람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내가 누군가에 고집 쎈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대신에 

최소한 나는 당신을 그 까칠함 이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명이자 암인 것이다.

그런 것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커피를 생산한 노동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2016년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어제 아내와 함께 서촌에 갔다.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와서 걷다 길을 건너 대림미술관에 갔다. 

토드 셀비의 [행복한 나의 집]을 잠시 관람하고 나서

천천히 걸어서 통인시장에 들렀다. 

인왕식당에서 소머리국밥을 먹고 [커피공방]인가 하는 

커피집을 들어갔다. 거기에서 [경복궁의 봄]블랜드를 드립으로 마셨다. 

가을 날 마신 봄 날의 커피는, 따뜻했다.


허영만 : 커피 한 잔 할까요?

2017년 


오늘 아내의 추천으로 허영만 선생의 [커피 한 잔 할까요?]를 

1권부터 5권까지를 읽었다. 3권인가 4권을 읽을 때는 자꾸 눈물이 나왔다. 

상화도 이야기(섬 이야기)와 치매에 걸린 남편의 르완다 이야기를 읽을 때였다.

읽으면서 예가체프를 두 잔 정도 마셨다. 한 잔은 진하게, 한 잔은 여리게 마셨다.


*

세상 만물에 사람과 사람들이 들어가 있지 않는 게 있겠냐만 커피는 

각별하게 이야깃거리가 많다. 만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역시 

봉지커피에 관한 것들이었다. 

내 인생샷이 봉지커피였는지 도대체 무슨 커피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상황은 기억이 난다.

4일 동안의 행군이었지싶다. 걷고 또 걷고, 잠시 자고 또 걸었다.

군화 속의 발은 짓물러 있었지만 행군 마지막 순간, 동료가 군장을 놓치자

받아들고 같이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구보를 하다시피 연병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원들이 오기까지 커피를 마셨다.

그때의 무슨 커피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며칠을 참았다가 다시 마시는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

허선생의 만화에서 여러 번 느낀 것은 '바리스타가 가진 커피에 대한 태도'이다.

'카피라이터의 카피에 대한 태도'도 그래야하지 않을까, 

거의 모든 대목마다 곱씹으며 보았다.

한 가지의 태도를 옮겨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커피밖에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카피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쓴 카피는 도대체 무엇이 있나요? 자문해 본다.

'잇몸에 마음 더하기?'

작품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의 말을 빌려서 바꿔보면, 

마음이 실리지 않은 카피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혹 요즈음의 트랜드를 따라가지 못한 카피는 아닌가요?

토드 셀비의 전시를 보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내가 있고,

내가 쓴 카피에 대해 솔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비겁한 건가?

더 깊이 고민하고 겸손해져야지, 한다.

(뭘 좀 칭찬 받아야 겸손할 텐데 ㅋ)


*

허선생님의 만화는 '낭만주의 화풍의 경지'라고 느꼈다.

선생은 커피를 모른다고 하지만 커피와 선생의 만화는 궁합이 잘 맞다.

와인에 대해 [신의 물방울]이 있다면, 커피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있다.

- 선생은 커피를 커피전문가처럼 다루진 않고 굳이 표현하자면 

[우리의 음료답게] 다루고 있고, 신의 물방울은 일본 답게 다룬다.

허선생의 작품은 봉지커피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다.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2017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글쎄, 분노가 없어지는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종종 어지러워요. 물리적으로 어지러운 거죠.

(아무래도 치료를 받아봐야겠습니다만.)

억울한 것도 없어져요. 별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값비싼 새 물건이 고장인데도 억울하지 않더군요.

눈이 잘 안보인다고 하면, 뻔하다 하실 텐데 진짜 잘 안보이구요. 

저는 렌즈 때문에 특히 더 그럴 거 같습니다만.

(눈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요즘은 처방 받아야 싸게 사는 그 눈물.)

아득바득 최고조에 이르는 텀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고...

그랬었습니다만 이제 그런 거 없습니다. 

뒤에 서고 싶고, 뒤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바른 사람 쪽으로 조금은 변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기보다는 

저녁마다 아침마다 깔끔하게 씻어내는 것을 더 선호하구요.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 빨리가서 일으켜 세웁니다.

넘어진 아이에게 괜히 미안해집니다.

저 때문에 넘어진 것도 아닙니다만.

무엇보다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가지고 다니는 그 눈물이 아니라 자주 운다는 뜻입니다.)

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져서 그런 건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기피하게 됩니다.

가급적 누구든 만나지 않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나면 너무 반갑습니다.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다짐을 하고 그 다짐을 지키게 됩니다.

젊을 적에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미묘한 것에 대해 글로 표현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에 자주 들리면서 시집을 빌려 읽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장석남 시인의 신작시집을 빌려왔습니다.

제게 싫은소릴 하는 사람도 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려니,합니다. 그러려니,한다고 날 또 미워할까요?

그럼 점점 더 안 미워지게 되려나요?


Bruce Springsteen : Nebraska

1982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틈이 나면 우리는 산책을 갑니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도 많습니다.

아내도 저도, 그런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타인을 이해하려고 듭니다.

이해할 수 없겠지요?

이런 의심이 생기는 것도 나이 탓이려나?

걷고 싶어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합니다.

운전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는데도 늘 차를 몰아서

다녔던 제가 이제는 걷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술만 줄이면 진짜 어른이 될 것만 같습니다.

타인을 비난하기 싫어집니다.

어제 비난했더라도 후회하게 됩니다.

나를 칭찬하기 싫어집니다.

조금 전 자뻑했더라도 지금 후회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이 쓰레기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듭니다.

그 누구에게도, 세상 그 무엇에도 피해를 주기가 싫습니다.

존재 자체가 피해라구요?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온갖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하루에 서너 번, 아내가 보고 싶습니다.

다시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 행복합니다.

(003)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2017년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어제 마음이 많이 상한 채로 퇴근을 했더랍니다.

- 광고일을 하면, 우울한 날이 많죠? 

일찍 퇴근해 푹 자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경험상! 


이른 오후였어요. 반차를 내고 집으로 왔습니다. 

거실에 택배박스가 있었습니다. 제법 컸어요. 

택배 올 것이 없는데... 뭘까? 역시 '핫트랙스'였습니다. 

2D면적이 LP의 두 배 되는 사이즈라 

바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5월이나 6월에 주문한 것 같은데 이 가을에 왔습니다.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좋았겠는데요, 

LP제작사는 예약을 받아두고 몇번이나 발매를 늦췄거든요. 

리이슈(한참 뒤에 재발매)된 요한나 마르치는 멋지게 생겼습니다. 


J. S. Bach : Sonatas & Partitas For Solo Violin

Johanna Martzy


가을에 도착한 요한나 마르치는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 나름 아름다운 기억은 시간이나 공간 중에 한쪽이 애매합니다. 

좋게 말해서 아른거립니다.

대구 동성로 삼덕성당 뒷편, 오전 일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전 일찍 거기에 갈 이유가 정말 한 개도 없는데. 

'틀림없이' 아침의 햇살이었습니다. 

빛살의 사이로 바흐가 흘러나왔구요. 빛살들이 

바닥에 깔리듯 스윽 스윽 활질이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옆에 있었습니다.) 홀린 듯이 바흐를 찾았고, 

바흐는 난로 환기구 옆에 매달려서 역시 빛살을 받으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작은 레코드 가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 가게 주인들이 거리에 빗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었군요. 

그리고 겨울이었군요.

청아하고 두꺼운 저 바이올린은 마르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레코드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는 안양에 살 때인데 대구로 간 것입니다. 

대구에서 학교다니던 시절이 아니란 거죠. 이상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안납니다. 그 레코드가 

진짜 마르치였는지... 마르치의 레코드는 특색이 분명해서 

잘못 듣진 않았을 텐데요.(라고 자신감을 부려봅니다.) 

골목 햇살 바흐 마르치, 그렇게 네 사람이 말끔하게 

빗질을 하던 (빛질을 했었나요?) 기억부터 택배 앞에서 

떠올렸다는 거죠. 

15초 정도 거실에 그냥 

서서 말입니다. (신독의 절대적 경지처럼 말입니다.)


바흐가 사람을 치료한다는 사실은, 사실입니다. 

상처 받은 마음이 잠들지 않고도 아물어 갑니다. 

바흐가 사람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도, 사실입니다. 

하루끼상이 [레코-드]라고 발음했을 때의 그 레코드는 

기억의 일부분이 됩니다. 

게르하르트 타슈너(Gerhard Taschner)의 레코드(소품집)도 

함께 주문했었나봅니다. 정말이지 절창입니다. 저건 바이올린이라기 보다 

아름다운 길을 굳건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청년의 성대 같아요.


엄청 좋아하고 있었는데 유행이더라고. 

관심 줄였더니 다시 유행이 아니더라고. 

저, LP 겁나 좋아했더랬습니다. 

돌고 돌아 다시 돌고 돌아옵니다. 

무엇이요? 당신이 사랑했었던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기로 합시다.

(002)

감기를 마치고

Cape Town, Western Cape, 2017년



감기를 마치고



감기를 마치고 집밖에 나왔다.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한참 걸었지.

      톰 웨이츠처럼 노래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가수가 아니니까, 카피나 광고를 톰 아저씨처럼...

(그건 그렇고,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는 톰 웨이츠를 들으면 돼.)


Tom Waits : Glitter & Doom Live

2009년


그의 노랫말에는 특정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사연: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있다는 거지.

그 사람의 안팍을 노래하는 거야.

그는 아마 카페의 죽돌이였을 거다. 그래야만

살아있는 노랫말을 쓸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노래할 수 있다.

카피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카피도 결국에는 사람을 노래하는 거잖아.

      카피는 예술이다.

조건절은 이 세상이냐, 이 마켓(타겟)이냐 하는 차이가 있겠지.

아무렴 어떻겠어? 노랫말이나 하나 써 보자.

(곡은? 만들어야지.)


감기에는 약이 없다곤 하지만

그 수많은 감기약은 또 무엇이며 그 절체절명의

카피들은 충분히 곱씹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다.

       걸렸구나 생각되면 콘택 600

뭐 이런 카피 기억이 나?


*

톰 웨이츠라면 어떻게 얘기했을까?

톰은 그저 감기를 들여다 보지 않았을까?

1. 감기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어쩌면 널 물리칠까?)

2. 감기 걸린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겠지.

: 어차피 앓아야하는 감기라면(약이 없다면)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좀 미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5년차 김대리의 눈망울에 대해 노래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말야, 톰 웨이츠의 목소리가 

그 자신이 당장이라도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의 술과 담배는 진정성을 가졌다.


*

제목은 '감기를 마치고'


      감기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비가 내릴 것만 같아, 그게 좋아서

      숨을 깊게 들이쉰다, 머리칼이 날린다.

      걷는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후렴)

      오늘 따라 꽃의 빛깔이 여리게 보인다.

      오늘 따라 바람이 더 짙어진 것만 같다.

      감기를 마치고 기분이 달라졌어.

      감기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려.

      감기를 마치고 맥주를 마셔.

      감기를 마치고 주말이 왔어.


뭔가 희망적이지 않냐?

언젠가 2절 가사도 만들어야겠지?

(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