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에 해당되는 글 36

  1. 2017.09.30 상상력과 이야기력
  2. 2017.09.28 은은하게
  3. 2017.09.27 당신의 바다는 어디입니까?
  4. 2017.09.25 2014년 4월 16일
  5. 2017.09.25 상상화
  6. 2017.09.22 걷다 쓰다

상상력과 이야기력



상상력과 이야기력



책 장에 틀림없이 두 권의 마르케스가 있다.

단편들이 들어있는 두 권 속엔 중첩되는 단편도 있다.

서점에서는 한 권만 사두어도 좋겠다.

너무도 값진 이야기들이니 한 권 중 한 편만 있어도 좋을 걸.


환상적 사실주의니 사실적 환상주의니 잘 모르겠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들은 그의 불세출의 장편

[백년 동안의 고독]만큼이나 훌륭하다.

그 훌륭한 점들의 가장 훌륭한 점은 바로 상상력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사람이 살았던 시대

예문, 1995년 


마르케스가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 본 것은

그가 한참 활동할 당시의 중남미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책을 제외하면 그의 소설은 모두

상상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상상력은 그의 독특한 필치로 펼쳐진다.

일상어들이 꼬리를 물고 간단하게 마무리되는 단편들이지만

단편 소설의 미덕을 충분히 발휘한다.

- 울나라 단편들의 그 사소설적 분위기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독특한 필치는 '환상성'에 기인한다. 

흔히 마르케스의 환상성을 리얼리즘에 기반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거창한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일 뿐이다.

작가 황석영을 흔히 황구라라고 부르는 맥락과 일치할 것이다.


      외계인이 우리집을 방문했다고 치자.

      그저 외계인이 우리 생활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지.

      외계인에 대한 선인식이 절묘하게 우리 생활의 한 면과 어우러지면

      상상력이 곧 잼나는 이야기가 되는 거잖아.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낯설게 하면서도 무르팍을 치게 하는 거야.


상상력이 곧 이야기力이 되는 셈이다.

자신감을 갖고 마구 펼쳐도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다면

마르케스를 읽어봄이 어떤가 싶어서.

우리에겐 굉장한 연휴가 갑자기 들이닥칠 때가 있잖아요?








은은하게

Belmond Mount Nelson Hotel, Cape Town, 2017년



은은하게



빛나는 향

봄날의 향이란, 당신과도 같다. 

라고 써 놓고보니 몹시 가렵다. 크하하 


향은 은근해야 제멋 아닌가 싶다. 

양키캔들이니 우드뭐니 집에도 몇 가지 향초가 있고

디퓨저라는 것들이 공간마다 향을 뿜어낸다.

최근 겐조의 광고가 ‘리트윗’되곤 하던데 

광고의 관점에서 뭔가 훌륭하겠지. 나는 별로.

향수광고는 좋은 게 많다. 

기본적으로 패셔너블하고 가끔은 철학적이지.

그래서 많이들 참고한다. 


마케팅 차원에서 매장에 특유의 향을 뿌리기도 한다.

삼성의 가전 매장에는 그만의 향을.

엘지의 패션 매장에는 또 그만의 향을.

그런데 물리적 향도 향이지만  

물리적인 향과 중첩되는 이미지적인 향도 있다.


*

일상에서 흔해서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커피와 술을 마시고 특히 위스키를 마시는 일인데

이것들이 모두 향을 품고 있다. 

위스키,라고 하고보니 뭔가 사치스러워. 비싸긴 하지. 

그렇지만 일을 끝내고 자정 무렵, 

딱 한잔의 위스키를 목 너머로 흘려보내면 

스르르 잠 또한 올 듯 말 듯. 

위스키도 뭐니뭐니 해도 은은한 것이 좋던데.

(거짓말이다. 강렬한 것도 좋다. 뭐든 없어서 문제겠죠.) 

음악조차도 들릴 듯 말 듯 은은한 것이 좋지. 

은근한 칭찬이 좋은 것처럼. 


*

그해 늦여름에 당신은 배꼽티를 입고 (94년에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뭔가 향수를 뿌렸다. 

나는 향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개코처럼 예민한 코를 가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선배가 

그 향을 내게 알려주었다. 


가을 하늘 정취야말로 향만큼 은은하다. 

언젠가 상호 형님이 향 한 박스를 주셨다. 


“현! 카피 쓸 때에 태워.” 


너무 아껴 태우는 바람에 나는 겨우 향 한 개비만 썼다. 

내 수첩더미 속에 향은 박스채로 고스란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 글 속에 상호 형님의 마음이 배어들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바다는 어디입니까?

감은사지 쌍탑, 2012년  


당신의 바다는 어디입니까? 



경주발 지진 기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감은사 폐사지와 폐사지 근처의 그 시커먼 바다를 떠올렸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바다에 간 가장 최근이었지싶어.

경주 양남 봉길해수욕장에서 출발해 해안도로를 따라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희뿌연 포항 북부해수욕장도 보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다빛이 위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위도라고 해봐야 작은 땅덩어리 거기서 거기일 테지만

바다는 달랐다.

양남 바다는 시커맸다. 거기 잠든 신라의 왕이 있어서인지

그 왕이 용왕이었는지 무속인의 깃발은 그때도 휘날렸다.


*

양남으로 가던 버스는 막 비를 맞고 있었다. 

저 앞에 아마도 문무왕의 산골처인 해수욕장이 

버티고 있던 지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버스의 차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그곳에 우뚝 거대한 탑이 그렇게 서 있었다.

브람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난 바로 운전사에게 소리쳤으니까!

"아저씨, 내려요!"

친구 둘이 따라내렸다.

쟤 왜저러냐고 중얼거렸겠지, 최소한 한 녀석은...

나머지 녀석은 여자 친구였으니 별말 없었겠지.

그게 93년이었다.

우리는 개인 하늘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폐사지의 돌무더기 위에서 사과를 깎아먹었다.

탑은 정말 아름다워서 사과맛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걸어서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때는 추운 가을이었다.


감은사 폐사지


몇 년 후 바람이 심하게 불고 해가 쨍한 날,

또 갔다. 뭘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훗날, 함께 갔던 사람을 찾으려 수소문해보기도 했다.

뭘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어쩌면 같이 갔던 그 사람이 궁금했던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몇 년 후에 그 바다엘 들러서 그만 앓아누워버렸다.

바닷가 민박집에서 깨어난 다음날 새벽 

북소리가 들려 나가 본 바닷가에는

제를 올리는 수십 명의 무속인들이 있었다.


그 바다를 내 바다라고 할 건 없다.

다만 감은사지의 그 쌍탑에 미쳐서(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여러번 들리다보니 어쩌면 가장 여러번 마주한 바다가 되었다.

어떨 땐 파랬다. 하지만 대체로 시커맸다.

깊어서 그럴테지. 추운 날이라 그럴테지 싶기도 하다.

하긴 바다가 중요하겠어? 그 바다로 가는 나의 길이 중요하겠지.


*

새로운 아웃도어 브랜드의 런칭을 위한 캠페인의

큰 테마로 물었던 거지.

      당신의 바다는 어디입니까? 라고.

웃기게도 내 바다는 탑 옆에 있는 바다라고 답한다.

대체로 시커멓고 가끔 파란 바다, 깊은 바다 그곳을 말한다.

반 시간 정도 쳐다보고 있으면 북받쳐 오르는 바다가 그곳이라고.



2014년 4월 16일

Chapelle du Rosaire, 2006년



2014년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나는 

마포의 HS애드 팀장/CD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강북강변 마포부근에서 세월호 속보를 접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싶었어.

그날 써 놓은 메모다. 


*

매일 아침 차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방송국으로 향한다. 

며칠 전 즐겨듣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한 광고를 듣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광고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C쇼핑몰 광고였다. 

내용은 이렇다. 

한 안내방송 요원이 5살 여자 어린이의 보호자를 찾는다며 

미아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던 중 그만 아이가 입은 옷에 관심이 쏠려 

"엄마 되시는 분, 이 옷 어디서 사셨어요?" 라고 묻는다는 상황 설정이었다. 

한 술 더 떠 이 방송요원은 엄마를 잃어버려 겁에 질려있을 것이 뻔한 아이에게 

"어머 예술이네. 이것보다 더 큰 사이즈는 없었니?"라며 묻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상상으로 만든 광고라지만 어떻게 이리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어린이 납치 살인 사건 뉴스를 들으며 불안해하는 

엄마들의 심정도 심정이지만 실제로 자식을 잃어버려 생사도 모른 채 살아가는 

'미아들의 부모'가 이 광고를 듣는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지... 

그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쇼핑몰은 최근 'C몰에서 구입했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비슷한 상황 설정의 광고를 

라디오와 TV에서 계속 하고 있다. 

가령 젊은 여성이 처음 보는 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매달리다시피하며 

"어디서 샀어요?"라고 묻는다든지 주례사를 읽던 주례가 신랑에게 엉뚱하게도 

"그 멋진 구두 어디에서 샀느냐?"고 묻는 식의 광고 말이다. 

모두 현실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을 설정해 만든 광고다. 

광고이기 때문에 상상과 과장이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두 편과는 달리 '미아찾기 광고편'(내 마음대로 붙였다)은 

듣는 이의 처지에 따라서 가슴에 대못을 한 번 더 박을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라디오는 상상의 매체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상상하며 

심리적 유대감을 갖기도 하고 또는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소리로 밑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림을 완성한다. 

라디오 광고 역시 청취자의 상상력을 유발한다. 

이 미아찾기 광고를 듣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서 엄마를 찾으며 울어대고 있는 아이에 대한 배려는 오간데 없고 

아이가 입은 옷에만 관심을 쏟는 비인간적인 안내원의 모습인가? 

아니면 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부랴부랴 달려와서 

아이를 안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엄마의 모습인가? 

사실 내가 그 엄마 처지라면 찾은 아이를 부둥켜 안기에 앞서서 

그 안내원의 뺨을 한 대 갈겨 줄 것 같다. 

어떠한 상상이라도 불쾌하고 씁쓸하고 슬프다. 

라디오 광고는 시각적인 자극이 배제된 채 짧은 시간 전달되므로 

듣는 이의 상상력을 제작자의 목표지향적 방향으로 최대한 자극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구매욕구도 생기고 기업이미지 제고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광고를 들으면서 이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은커녕 

쇼핑몰 관계사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마저 갖게 되었다. 

사람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는 현실의 한계가 채워줄 수 없는 

행복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그 가치가 있다. 

그래서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감동이 있는 광고는 

단 20초 동안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소재의 범위를 넓히고 역발상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 다수의 공감이다. 

귀를 때리는 천박한 자극보다는 인간성이 살아있는 광고가 

그 효과면에서도 단연 앞선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상화



상상화



누구가 내려다보면 

어떤 사내가 

아파트 뒷 화단의 꽃에 

휴대폰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땡볕 아래.


*

상상화란 , 아니?

지난여름 식구들과 신흥사에 다녀왔다.

신흥사는 그렇듯 북적였다.

동대문 시장도 휴가라고, 일주문 안쪽의 상인들이

말해주었다. 휴가 상인들이 모두 속초로 

몰려온 것도 아닐 텐데 그날만큼은 

가는 길도 오는 길도 많이도 붐볐다. 

한데 경내로 들어서고 다시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섰을

사람이라곤 우리 식구와 기와불사 접수를 받는 

보살 뿐이었다.

경내는 갑작스럽게 고요해지고 

우리는 여유롭게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대웅전 아래 화단에서 특이한 꽃을 보게 되었다.

큰애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봐요, 하듯 눈을 찡긋하면서.

전에 왔을 때엔 몰랐는데 아마 그때도 피어있었겠지.

예쁜 꽃이었다. 

그런데 꽃을 받치고 있는 대궁만 있고 입사귀가 없더라. 

독특하다 했더니, 꽃은 상상화란다.

想像花. 

보살님이 아이 곁으로 다가가 설명해주는 것을 

나도 함께 들었다.

잎사귀가 먼저 나는데 잎사귀가 

메말라 떨어지고 후에야 꽃이 핀단다

그러니 꽃과 잎사귀는 서로를 없어 

서로의 모습을 상상만 뿐이란다. 

그래서 상상화란다.

얼마 바람이 세게  

꽃이 꺾였다고 하더라.

흔적이 있었다. 

꺾이면서 꽃은,

다른 세상으로  잎사귀를 만났을 것이다. 

잎사귀 또한 꽃을 만났겠다.

상상 그대로였을까 

상상이 깨지는 순간이었을까 상상화란다.


*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아는 척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안타까워 하지 말라.

우린 사실 만난 적도 없잖아.







걷다 쓰다

Cape Town, 2017년



걷다 쓰다



'걷다'라는 동사는

'쓰다'라는 동사만큼 멋지다.

이 걷다와 쓰다 사이에 '생각하다'라든가

생각을 없애다 같은 동사를 집어넣으면

뭔가 지리멸렬해진다.

그저 '걷다/쓰다' 이 정도가 좋다. 어쨌든.


*

이병헌은 내내 걷는다.

(막연한 영화평이긴 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병헌이 걷는다는 거다.

      그는 왜 걷기만 할까, 뭔가를 좀 써봐야지.

정말 막연하지? 이런 의문들이 말이다. 다시 어쨌든


이병헌은 걷는다 멈춰 서서 바라본다 다시 걷는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나는 이병헌이 걷기만 해서 

그가 죽은 사람인 것을 알아버렸다.

돌이켜보면 그가 이승에 등장하는 한 대목에서만,

아들을 걱정해서 병원으로 가는 그 대목에서만

      걸음을 멈추고 뛴다.

      

이주영, 싱글라이더

2017년 


실연을 당한 사람이 운동장을 달린다.

익숙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아픔을 가진 사람은 걸으면서 털어내기도 한다.

걸으면 바람을 맞지, 바람 속에 하나씩 털어내는 거다.

바람에 날리는 슬픔과 화는 이런 메시지를 남긴다.

      너무 좋은 것에는 항상 거짓이 있는 법이예요.

이병헌의 이 대사는, 뻔하다.

그래서 좋다. 걷는 것 만큼이나 좋다.


*

걷다,는 동사는 어떤 의식을 말하지 않는다.

걷고 와서는, 걸을 때 부딪혔던 바람에 대해

뭔가를 써 볼 일이다.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산 자로서 쓰다,라는 행위는 크나큰 위로다.


*

걷다 쓰다

위로 받다

혹시 카피를 발로 썼다,고 했을 때의 

긍정적 의미가 이런 건가?

두 개의 카피가 똑같아도

카피라이터는 같지 않다.

카피라이터의 생활과 삶이 중요한 거지.

카피나 광고 따위가 아무려면 어떻겠냐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