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2017년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어제 마음이 많이 상한 채로 퇴근을 했더랍니다.

- 광고일을 하면, 우울한 날이 많죠? 

일찍 퇴근해 푹 자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경험상! 


이른 오후였어요. 반차를 내고 집으로 왔습니다. 

거실에 택배박스가 있었습니다. 제법 컸어요. 

택배 올 것이 없는데... 뭘까? 역시 '핫트랙스'였습니다. 

2D면적이 LP의 두 배 되는 사이즈라 

바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5월이나 6월에 주문한 것 같은데 이 가을에 왔습니다.


요한나 마르치는 가을에 도착합니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좋았겠는데요, 

LP제작사는 예약을 받아두고 몇번이나 발매를 늦췄거든요. 

리이슈(한참 뒤에 재발매)된 요한나 마르치는 멋지게 생겼습니다. 


J. S. Bach : Sonatas & Partitas For Solo Violin

Johanna Martzy


가을에 도착한 요한나 마르치는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 나름 아름다운 기억은 시간이나 공간 중에 한쪽이 애매합니다. 

좋게 말해서 아른거립니다.

대구 동성로 삼덕성당 뒷편, 오전 일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전 일찍 거기에 갈 이유가 정말 한 개도 없는데. 

'틀림없이' 아침의 햇살이었습니다. 

빛살의 사이로 바흐가 흘러나왔구요. 빛살들이 

바닥에 깔리듯 스윽 스윽 활질이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옆에 있었습니다.) 홀린 듯이 바흐를 찾았고, 

바흐는 난로 환기구 옆에 매달려서 역시 빛살을 받으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작은 레코드 가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 가게 주인들이 거리에 빗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었군요. 

그리고 겨울이었군요.

청아하고 두꺼운 저 바이올린은 마르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레코드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는 안양에 살 때인데 대구로 간 것입니다. 

대구에서 학교다니던 시절이 아니란 거죠. 이상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안납니다. 그 레코드가 

진짜 마르치였는지... 마르치의 레코드는 특색이 분명해서 

잘못 듣진 않았을 텐데요.(라고 자신감을 부려봅니다.) 

골목 햇살 바흐 마르치, 그렇게 네 사람이 말끔하게 

빗질을 하던 (빛질을 했었나요?) 기억부터 택배 앞에서 

떠올렸다는 거죠. 

15초 정도 거실에 그냥 

서서 말입니다. (신독의 절대적 경지처럼 말입니다.)


바흐가 사람을 치료한다는 사실은, 사실입니다. 

상처 받은 마음이 잠들지 않고도 아물어 갑니다. 

바흐가 사람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도, 사실입니다. 

하루끼상이 [레코-드]라고 발음했을 때의 그 레코드는 

기억의 일부분이 됩니다. 

게르하르트 타슈너(Gerhard Taschner)의 레코드(소품집)도 

함께 주문했었나봅니다. 정말이지 절창입니다. 저건 바이올린이라기 보다 

아름다운 길을 굳건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청년의 성대 같아요.


엄청 좋아하고 있었는데 유행이더라고. 

관심 줄였더니 다시 유행이 아니더라고. 

저, LP 겁나 좋아했더랬습니다. 

돌고 돌아 다시 돌고 돌아옵니다. 

무엇이요? 당신이 사랑했었던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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