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에 해당되는 글 36

  1. 2018.03.06
  2. 2018.03.05 문득
  3. 2018.03.05 무게
  4. 2018.03.05 블루스-오블리가토
  5. 2018.02.08 아버지
  6. 2017.10.14 죽음의 매뉴얼: 부고
  7. 2017.10.08 평균율 읽기
  8. 2017.10.08 마지막 콘서트
  9. 2017.10.06 개념적 요설
  10. 2017.09.30 제작은 재기획이다

Gothia Towers, Gutenberg, Sweeden, 2015년





광화문: 살짝 숨이 가쁘다. 

오늘 오랜만에 와서 보니 그 옛날 광화문 생각이 난다. 

광화문이 많이 바뀐 것도 같아서 그런가보다.


동아일보 사옥이 광화문으로 옮겨가려던 2000년이었다. 

나는 신춘문에 당선되었고 시상식에서 

비평의 대상이었던 소설가를  만나기도 했다. 

나보다 키가 컸던 소설가 김씨는 무척이나 세련되고 멋있어서 

말도 걸어보질 못했다. - 내게는 후에 소설로 당선된 경향신문에 대한 

기억도 있는데 보통은 ‘정동 끄트머리에 가면’ 정도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승우, 윤대녕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맥주를 마신 에피소드로 

마무리 된다. 그래, 자랑이다. 존경하는 선생님들이니까.) 

시퍼런 한강을 처음 본 것도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새마을호 첫 차를 타고 출발하면 늦은 아침 무렵 한강을 건넌다. 

기차가 역에 가 닿으면 나는 강물처럼 걸어서 광화문으로 갔다. 

그리고 광화문만 가면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점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래 백화점처럼 붐볐다. 하지만 

그때의 서점은 여러모로 달랐다. 


나는, 혹은 우리는 갈 곳이 서점 밖에 없었다. 

찻집과 술집, 영화관도 있었지만 있었지만...

찻집과 술집, 영화관에 책이 없었다.

그래 그때의 서점과 지금의 서점의 가장 큰 차이는 책이 다르다는 거지.



*

요즘의 책들은 읽히려고 만든 책 같지가 않다. 

팔리기 위해 만든 책 같다. 출판업이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을 기다렸다 소유하고 가끔씩 꺼내어 읽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재미가 사라져 가는 것도 사실이다. 


Bill Evans : Quiet Now

1969년

교보에서 책을 ‘읽진’ 않았다. 목차를 봤다. 

수십 권 책의 목차만 골똘히 읽어도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 어떤 사람이 최소한 이상의 진지함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책이겠지. 

목차가 가장 객관적으로 요약하고 있을 것이고. 

요즘은 목차만 읽기에도 벅차다. 

책이 많고 비슷한 책이 많아서  비슷한 목차가 많다. 

비슷한 책들 - 책들이 비슷하다는 건 독자에게 치명적이다. 

저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안다.


아내는 나이 들어 서점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심플 라이프’에 대한 책들만 모아서 전문화하겠다고 한다. 

책들은 비슷하겠지만 나름의 깊이들이 차별적이어야 할 것이다.


길을 건너면 교보문고다. 

오늘도 붐빌 것이다. 

전문화된 코너의 전문화되지 않은 복잡다단함으로 

도서관적 위용을 뽐낼 것이다. 

옛날에 교보문고에 진열되었던 '그 책'을 찾아 

지방으로, 또 소규모 독립출판물이 있는 작은 서점으로 

사람들은 산책 갈 것이다. 

나는 오랜만의 광화문에서 교보문고를 지나쳐버릴 것이다.

이 시덥잖은 이야기의 결말은 이런 것이다. 

광화문은 교보문고이고, 교보문고는 내 맘에 드는 책이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득

Taipei, 2017년




문득



잡다한 생각들.

거의 오늘 하루에 벌어진 일들인데 정말이지 주마등처럼 

하나 둘 하나 둘... 

여성 동지 둘이서 내가 쓴 카피가 좋다 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짐짓 대가인 척하며 일하는 방법에 대해 설파하였다. 

나는 하루에 1시간 정도를 컴퓨터로 작업하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PPT를 쓰지 않아. 대부분의 시간은 생각을 하는 데에 쓰지. 

너희들도 나처럼 시간을 잘 써라, 그렇게 아이디에이션을 해라. 블라블라... 


막 낯이 뜨거워지면서 웃긴다. 

내가 쓴 카피는 그저그런 것이었다. 써 놓고서 한두 시간 정도는 

나도 만족했다. 굉장히 길어서 언뜻 보면 그럴 듯해 보이긴 했다. 

낮에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후배녀석과 막걸리를 마시면서 

회사의 대표라든가 주변 사람들 험담을 했다. 

험담을 할 때에는 정의롭고 당당하게 말한다고 느꼈는데 

해가 지면서부터 도대체 그들이 험담을 들을 이유가 뭐지? 

내가 험담을 하는 이유는 또 뭘까? 곰곰 생각에 빠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에 대한 주변의 그 불합리성에 대해 아내를 통해 질타했다. 

이건 또 뭔가, 하고 자괴감에 빠졌지만 낮에 미뤄둔 일을 하자,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기타를 집어들고 신중현의 미인을 쳤다. 상황이 좀 더 우스워졌다. 


Towner, Abercrombie : Five Years Later

1982년


하루가 완전하게 저물고 나면, 그리하여 술을 완전히 깨고나면 

잠깐 동안은 반듯해 질 것이다. -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광고인은 시뻘겋고 알록달록한 

무당 같다는 생각. 무녀가 칼춤을 추며 영령을 불러들여 

영의 모습을 대신하는 것처럼 

나는 광고주가 되고, 소비자가 되고, 기본적으로 

고객임을 자각하고는 한다는 것. 나는 어쩌면 오늘 

특정할 수 없는 어떤 몰지각한 광고주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줄 광고비를 그 따위로 써버리는 못된 놈 

대행사 대표 이놈, 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잇몸약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잇몸이 아파와서 치과에 다녀온 것은 

불과 며칠 전이다. 하긴 옛날에는 보일러 브랜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멀쩡한 보일러를 갈아치우기도 했다. 걱정인형을 스톱모션으로 찍으면서 

인형처럼 단순한 척 하기도 했지. 도대체 나의 순수한 영령은 어디 있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광고인으로서는 자랑스럽다.


깊지 않은 생각을 받아들여야하는 숙명은 마치 군인과도 같다. 

조직은 늘 고무줄처럼 경화된다. 

잇몸은 언제 아팠냐는 듯 더 튼튼해졌다. 

모쪼록 인생 너는 더 재미있길 바란다. 

 



무게

Berlin, 2015년




무게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허리가 아주 많이 꼬부라졌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할머니와 내가 상당히 친한 것도 같지만 

사실은 집 앞 골목에서 또 편의점에서 본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그저 한 번 본 거지. 

담배를 사러 가던 참이었다. 편의점 뒷문이 골목 중간쯤 있었다. 

허리가 심하게 꼬부라진 할머니 한 분이 걸어가고 계셨다. 

잰 발걸음으로 걷고 계셨지만 사실 굉장히 느리게 전진했다. 

기이한 광경인지도 몰랐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 물론 직접 여쭤보진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속으로 궁금했다. 

할머니를 지나쳐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담배를 사고 나서 편의점으로 들어서는 할머니를 다시 보았다. 

할머니께선 천 원짜리 지폐다발을 만 원짜리로 교환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구부정한 허리로 천천히 

계산대 앞으로 걸어오신 할머니는, 

지폐 다발(대략 스무 장쯤으로 보였다.)을 든 손을 쭉 내미시며

이거 바꿔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셨다. 꼬깃꼬깃, 언제부터 모은 천 원 짜리 였을까? 

아들이 준 용돈이었을까? 

폐지를 모아 차곡차곡 모아 둔 돈이었을까? 

손자에게 줄 용돈이었을까?

저 돈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을까?

허리가 꼬부라진 것 말고도 할머니의 얼굴에는 

시간의 더께가 쌓여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내려앉았을 

그 가벼운 먼지들이 그녀의 허리를 굽혀버린 것은 아닐까. 

태어남, 성장, 희망, 교육, 만남, 사랑, 연애, 결혼, 

남편, 출산, 자식, 이별, 미련, 손자, 죽음에 다가 섬...... 

아르바이트 점원은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Jakie McLean : McLean's Scene(Old Folks)

1957년


나는 할머니의 행색을 보고 

그이에게 2만 원이란 큰 돈일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동시에, 

천 원짜리 한 장도 무거울 수가 있다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언제 재래시장 좌판을 쭉 따라들어가며 돈의 무게나 가늠해봐야지, 

내는 돈, 받는 돈, 거슬러 주는 돈, 오고 가는 돈과 식재료들, 삶이 

꿈틀대는 모습이겠지. - 도시의 재래시장은 그 생동감이 덜하다. 

그저 또 하나의 도시 같은 느낌이랄까. 

문득 돈이란 돈스럽지도 않고 돈스럽지 않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 그 돈으로 무엇 하시게요?

살갑게 한 번 여쭈어봐서 돈의 무게를 가늠해 볼 것을 그랬다. 

하기는 내가 계산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시덥잖은 카피가 떠올라 민망하다. - 내 정신적 거만함에 비춰봐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

바꿀 수 있다. 돈은 그저 냄새만 나는 다발이 아니거든. 

몸과 정신의 추억 같은 것이기도 하다.

(007) 

블루스-오블리가토

서울, 2016년




블루스-오블리가토



호텔 지하 주점으노 날 불렀다. 

오부리아저씨도 불러 라이브 기타연주를 들었다. 

'오부리'가 터져나올 때마다 감탄했다. - 연주가 좋아서 감탄하고, 

어쩌면 라이브여서 더 좋았는지 모른다. 

일부러 비싼 술을 마시는 건 그 기타 연주 때문이다. 

 

오부리라는 뭔가 치사한 느낌의 워딩은 

오블리가토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이가 한 소절을 부르면 기타맨은 오부리를 붙인다. 

거기에 누군가 팁을 덧붙여주기도 한다. 연주가 거듭 될수록  

기타맨의 기타 소리는 차차 고독해진다. 마지막 곡의 '애드립' 쯤은 

혼자서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은 연주다. 

세상에는 스윙이라는 리듬과, 블루스라는 멜로디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섞일 수 없다. 

- 주여, 세상을 미분하면 모두가 우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쯤인가, 황미나의 만화 

[메이저에서 마이너까지]를 읽었다. 비슷한 걸 찾아 더 읽었다. 

역시 황미나의 [레이크를 위하여] 같은. 

그렇게 음악만화(?)를 섭렵했는데 그 중 황당무계한 스토리가 하나 있었다. 

그건 허영만 선생이 그린 [고독한 기타맨]에 나오는 기타맨 

이강토의 히스토리였다.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고독한 기타맨]이지만

(몇 권까지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기타리스트가 아닌, 

기타맨의 시절이 있었다. 

뭔지 모를 그 고독함을 잣대로 기타맨을 몇 사람 추려내면, 

신중현 선생은 내 세대에게는 딱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늘 저명했고 김창완의 퍼즈는 시대의 블루스였으며 

김수철의 목소리는 작은 거인의 것이었다. 지금은 

신윤철이나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라의 조웅이 기타맨스럽다. 


만화 [고독한 기타맨]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 결국 이강토는 나락으로 떨어져 밤무대도 아닌 이른바 

룸싸롱의 기타맨이 된 거다. 그런데 이 룸싸롱에 EMI의 수석 프로듀서쯤 

되는 사람이 한국의 바이어로부터 접대를 받으러 나타난다. 

기가 막힌 우연이지. 

한국의 바이어가 술을 좀 마신 다음, 오부리를 불렀다. 

이강토가 룸에 들어온다. 

EMI는 신들린 듯한 이강토의 오블리가토를 듣고 감탄하며 

여러 곡을 감상용으로 주문한다. [보헤미안 랩소디]도 나오고 

별의별 명곡들이 다 나왔다. 

강토의 실력을 간파한 EMI는 그를 픽업해 월드와이드 데뷔시킨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강토 핸드릭스'쯤 된 이강토, 하지만 그는 

월드투어 도중 감전(사인이 정확하지 않다. 내 기억을 확신할 수 없다.)으로 

생을 마감한다. 


Roy Buchanan : Live In Japan

1978년


알콜 중독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던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기타맨 로이 부캐넌의 연주를 듣는다. 

잠시 후 나는 커피를 끓이듯 직접 블루스를 연주해 본다. 

엉터리 연주다. 

'우울증 따위'라고 경시했던 내가 스스로 우울을 자각하면서 

기타를 잡았다.

 흑인들이 블루스에 슬픔을 우겨 넣었듯 우울한 멜로디 속에 

우울을 묻혀 넣는다. 

기타는 마음이다

라고 부캐넌이 말했다고 한다. 

블루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돼지가 되어있거나 다른 것에 미쳐 있겠지.  


아버지

Monte Mulini Hotel, Robinj, Croatia, 2014년



아버지



J. S. Bach : Goldberg-Variationen 

Sitkovesky, Maisky, Causse


걱정이 많으면 새벽에 일어난다. 소박한 3중주를 듣는다. 

희뿌윰한 창밖을 배경으로 소박한 활질이 스윽 스윽 겹쳐진다. (어두움 따위야!) 

레코드 재킷의 뒷면을 보면 ‘In memoriam Glenn Gould”라는 글귀가 있다. 

역시나 굴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연주는 거의 다르게 들려온다. 

하얀 눈이 드러나고 눈을 살며시 밟아가는 세 사람 같다. 

(새벽의 음악이란 모두 그런 건가?)


가끔 불경스럽게 아버지의 돌아가심을 상상한다. 

부친의 죽음이 무섭다. 슬픔을 미리 가늠해보는 것은 

너무도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않고 있다. 

지금 난 광명을 출발해 대구에 나를 내려주고 부산으로 갈 154 KTX 열차의 

1호 차 1A에 앉아있다. 숫자와는 달리 맨 뒷자리다. 

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아버지를 생각한다. 

기차는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다. 

지난주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입원실에 누워계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수술 전후 매일 전화를 드렸다. 형과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수술이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찾아뵙도록 한다.

옛날 옛날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스승의 날에야 찾아뵙습니다, 로열 와이셔츠


신문의 작은 쪽지 광고 같은 거였고, 나는 이 카피를 

그 광고를 옮긴 책에서 보았다. 

이 카피가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아직까지 기억한다. 

(이 카피를 쓴 분은 웰컴에 계시던 김태형 선생님이다.) 

늘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 

마음이라... 마음 따위가 뭐라고.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아버지와 눈을 맞춘다. 

아버지 앞에서 웃는다. 

아버지, 하고 슬쩍 불러본다. 

마실 것과 드실 것을 따른다. 

그렇게 하고 싶다’ 보다는 ‘그렇게 한다’ 가 맞다.


며칠 후 늦은 오후 광고주로부터 부고를 접하고 6시 정도 포항으로 출발했다. 

서이사의 모친상이었다. 가는 길은 눈이 내리고 얼어붙어 있었다. 

따뜻한 빈소에 도착하니 상주가 이런 얘기를 한다. 

- 조문을 가서 늘 듣는 말이 ‘있을 때 잘하라’였는데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살아계실 때 잘하라. 


소주 두 병을 나눠마시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영천 정도를 지나고 있을 때 때마침 형님으로부터 

아버지가 퇴원해 집으로 오셨다는 연락이 왔다. 

동행들과 함께 회사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 문병 가는 길은 길고 멀었다. 

광고주의 문상 가는 길은 짧고 가까웠다. 

누구든 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부모의 죽음은 상상조차 싫어한다. 

자주 뵙는 것으로 다짐. 

(2017년 겨울 어느 날)


죽음의 매뉴얼: 부고

Tate-Modern, 2015년



죽음의 매뉴얼: 부고


사람이 돌아갔단 소식도 사람이 태어났단 소식만큼 놀라웁다. 

나는 여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서 존 메이어의 버드라이트 콘서트를  풀 버전으로 보고 있다.

어제 꿈 속에 어떤 구식 파일을 보았다.
한자가 섞인 부고들을 모아 놓은 파일이었다.
살아서 본 것처럼 생생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말라서 비틀어진 풀의 기운이 

먼지가 되어 풀풀 날렸다.
그 한 장 마다에 한 두 개, 많게는 세 개의 죽음이 스크랩 되어 있었다.

누렇게 바랜 두꺼운 종이들이 여전히 강직했지만 정말 옛날 옛날 것이 분명했다.

태어났단 소식도 돌아갔단 소식만큼 흔하긴 하다. 

나는 여태 살아서 꿈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데 말이지.

언제였더라. 아마도 살아있는 내내였을 거야.
옆에서 누가 죽었다더라, 들려주면 그것이 부고였던가 싶었다.
잘 간 것인가, 잘 돌아갔느냐.
존 메이어는 저렇게 자신있게 기타를 치고 있는데 말이지.




평균율 읽기

해주, 2010년



평균율 읽기



어제 7월 16일 오전에

마포대교에서 비행하는 새들을 보았다.


이시영: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년 


외우는 시가 몇 개(수,라고 해야하나요?) 없다.

그 가운데


충남 연기군 남면 상공을

아기 갈매기 네 마리가 눈부신 흰 깃을 펄럭이며

일직선으로 난다

아아, 첫 비상이다

라는 시가 있다.

이시영 선생의 봄,이란 시의 전문이다.

(본 글에 인용되는 시는 모두 이시영 선생의 것입니다.)

봄의 생동감을 정밀하게 노래하는 이 시는

역동성보다는 경건함이나 장엄함을 드러낸다.

이 회화적 심상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시상의 바탕에 조화와 교감,

그리고 공존의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평균율의 프렐류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백꽃 꽃숲에 참새들이 떼지어 앉아

무어라 무어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동백꽃 송이들이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 하면서

무더기로 져내리고 있었습니다

- 어느 석양 全文

져 내리는, 생명을 다하는 꽃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요소들이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의 방식에서 비롯하기에 아름답다.

공존한다.

이것은 푸가다.


저물녘 벼랑에 선 나무들은 외롭지 않다

능선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팔을 뻗어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그들을 강력하게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 引力 全文

이것은 프렐류드와 푸가 사이의 휴지기다.

문득 인문학과 예술은 생태학이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들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 忍冬 全文


이것은 청중과의 교감이다.


조선의 옛 마을에 감꽃이 진다

고추밭에서 돌아온 아낙네가 물 묻은 머릿수건을 벗어

   탁탁 털며 부엌에 들어가

늙은 시아비의 서늘한 점심상을 차리는 동안

산은, 앞산은 다시 한번 짙은 초록 그늘을 벗고

연록으로 잔잔히 물들어간다

- 옛 마을에 들러 全文

이것은 나의 감상이다.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는

매서운 겨울 내내

은은한 솔 향기를 천리 밖까지 내쏘아주거늘

잘 익은 이 세상의 사람 하나는

무릎 꿇고 그 향기를 하늘에 받았다가

꽃 피고 비 오는 날

뼛속까지 마음 시린 이들에게

고루고루 나눠주고 있나니

- 어느 향기 全文

이것은 프렐류드와 푸가다.


조개처럼 비밀을 꼭 닫고 산 여자가 있었습니다

죽어서 그 속에서 아름다운 줄무늬의 진주가 나왔습니다

일생 동안 그녀의 혀가 필사적으로 밀어낸

- 침묵의 무늬 全文

이것이 로잘린 투렉의 평균율이다.


*

카피는, 세계관으로부터 나온다.

어찌보면 세계관의 공유, 공감, 공존일 터.


당신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

답해보라, 어떻게든 보고 있을 테니.


내가 어디에다

      고맙습니다

라고 카피를 썼다면, 그것은 나의 세계관이다.









마지막 콘서트

우도에서, 2014년



마지막 콘서트



*

Bruckner: Symphony #9

Claudio Abbado, 2014년 


북부 롬바르디아인 줄리니가 그랬듯

밀라노의 클라우디오 아바도 또한

일종의 독일오스트리아의 정신을 구현해냈다.

그의 베토벤과 브람스가 그러하고 

말러와 브루크너 또한 그러하다.

이탈리아 지휘자들이 오페라를 내려놓고 

콘서트 포디엄에만 서게 되면 레퍼토리의 절반이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이 된다.

그럼에도 음악이란 세계는 매우 흥미로와서

이탈리아 지휘자만 보더라도 

토스카니니, 줄리니, 무티, 아바도, 샤이, 가티의

베토벤, 브람스, 말러, 브루크너가 전 세계 

애호가들을 납득시키고 몇몇은 최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진다.


*

아바도의 마지막 레코딩은 브루크너의 9번이다.

9번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가장 선호되고 

또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과거 줄리니는 예의 그 큰 스케일로 음향의 

성찬을 맛보여 주었고

첼리비다케는 역시 느림의 미학을 선보였다.

또 반트가 내보인 음향의 순수함과 우직함은

禪僧의 도량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내기도 했다.


언젠가 퇴근길에 아바도의 마지막 레코딩을 들었다.

1악장이 혼란해지기도 전에 40대 한 남자가 

비 내리는 도로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바도의 약음들은 세상 그 어떤 약음보다 작은 소리였고

강음들에는 마냥 약진하지 않는 달콤함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약음과 강음의 사이에는 마치 

일흔여덟 단계의 강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목관은 나무소리를 내고 금관은 빛났다.

스트링들은 무리를 이루어 군무를 추어댔다.

      앙상블이 정교해지면 음향은 투명해지는구나.

이것은 '음악의 음악'이지 

오스트리아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2013년 8월 21일부터 26일간의 연주.

루체른에서의 일곱날(이레).

CD의 재킷에는 THE FINAL RECORDING이라 인쇄되어 있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

물론 마지막일지는 아무도 몰랐던.





개념적 요설

과천, 2012년



개념적 요설



영화 남한산성을 본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소설 남한산성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명절에 찾은 아버지의 소담한 책장에는 

그간 근무하신 이력을 증빙 하듯 여러 자료들이 

모로 서서 차곡차곡 횡으로... 

그 속에 아마도 내가 읽은다음 가져다 드렸을 

소설 [남한선성]이 꽂혀있었다. 

이 장면은 '역사소설'로서 남한산성의 값어치다.

역사픽션이니 팩션이니 역사 그대론 아니라느니 

기레기 어투의 잡스런 문투가 난삽한데...

'역사소설'도 '역사적 상황을 기반한 영화'도

역사적 사실(을 비틀든 그대로든)을 어떤 관점으로

활용하는가,는 '지금'에 비추어 비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역사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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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지나 처가에 들른 차에 처가 앞 

큰 스크린 하나만을 가진 극장에서 [남한산성]을 보았다.

다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저건 개념적 요설'이라며 

힐난하는 나에게 아내는 어쩐 일로 '지루하긴 했다'라며

오랜만에 내 말을 거들었다.

(소설은 '말'에 대한 이야기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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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요설,이란 과한 스타일링을 말한다.

[칼의 노래]는 감동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

그 문장의 단련이 어느 정도 

'이야기적 깊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을 거치면서

그의 역사소설의 소설적 성취는 

김훈이 제안하는 '기획방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희생된다.

그것이 메시지라면 그의 문단들처럼 중언부언되는데

그 중언부언이 이상하게도 개념에 머물러버린다.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

영화는 아마도 소설보다 더 심하게

개념적 요설의 뼈대만 남기고 마무리된다.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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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기획방향이 크리에이티브는 아니지 않느냐?

이조판서: 전하~! 그러하옵니다. 긴 카피가 필요하옵니다.

예조판서: 전하~! 진현(카피라이터)을 능지처참 하시옵고 기획방향을

      조총으로 만들어 광고주의 심장을 찔러야하옵니다.

인조: 정녕 고려할 것이 그것 밖에 없단 말이더냐?


뭐, 이런 내용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현대에 비추어? : 너무 단순하다.



제작은 재기획이다

LP의 재킷, 뭉크의 그림



제작은 재기획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책이다.

용어가 좀 다르지만 주요한 책들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 2009년에 나온 책이니까 사실 굉장한 거다. 


이근상: The Link

웅진윙스, 2009년


다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서점에서든 어디서든 구하기 쉽지는 않을 텐데

반드시 구해서 읽어보면 좋다. 

나는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면서 읽는다.


크리에이터와 세상을 연결하는 소통의 법칙: The Link

콘셉트보다 강력하고 포지셔닝보다 정교한 9단계 커뮤니케이션 전략


이라고 표지에 되어있다.

간략히 책의 제목은 The Link다. 지은이는 이근상이다.

- 같이 일하던 분이다. '모시고 일하던' 같은 표현을 아주 싫어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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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요약은 CBR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C는 현재 변화했다. 늘 그래왔듯.

C의 기본적인 속성은 우리면서 컨슈머라는 거다. 

변화된 우리 스스로를 잘 살피면서 책 속 C에 대입해서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이 책은 김난도 교수의 통계보다 더 잘 예측한다. 

- 보면 안다. 물론 저자가 예측 하듯 책을 쓰진 않았다.

가령 최근 버전 구글의 모먼트 개념도 이 책에 기술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케팅이라는 화두가 활기있게 디벨로핑되던 그 시대', 

그러니까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보다 더 적합한 책이긴 하다. 

- 그래서 그때 나온 거겠지.

하지만 CBR이론, 즉 LINK이론을 통해서 광고를 '기획'하는

'기획력'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나는 이런 우직한 대목이 가장 좋다.

브랜드 콘셉트는 브랜드의 존재 이유이며, 브랜드가 성장해가는

기준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로 광고나 커뮤니케이션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고 싶다.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지향하는 철학, 소비자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혜택 등으로 그 브랜드를 정의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비자의 언어로 그대로 번역해서 커뮤니케이션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이, C가 더 이상 브랜드가

일방적으로 정한 메시지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 가치를 만들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 편집자 혹은 워싱한 사람의 분발이 필요한 문장들이긴 한데... 

내용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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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내 화두는 '기획력'이다.

클라이언트로부터의 발주내용은 가감없이 내게 전달되거나 

'해석되어' 전달된다.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것은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닌 

'기획'단계로 뻗어있는 상태다.

클라이언트라는 A, 그리고 AE인 B -

A에 대한 B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다. 그 구도에서 제작팀의 작업은 시작된다.

A가 누구든 B가 누구든, 난 AB의 대화를 경청하고 싶은 거지.

기획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바로 제작이다.


기획이 사라져가는 광고커뮤니케이션이 횡행한다. 

광고기획이란 이런 거다,라는 가치를 품은 책

The Link를 나만 한번 더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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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belius: Symphony #2

Colin Davis, 


우연히 시벨리우스를 듣고 있었다. 2번이라면

체스키의 다른 레코드를 좋아하는데

우연히 콜린 데이비스였다. 좀 더 정치한 맛이 있는 연주다.

책의 저자는 2번의 이미지다. 현학적이지 않은 차가움?

나는?

7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