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확하게 명확한

2018년



불명확하게 명확한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몇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미즈미는 30년 전 살인을 저지르고, 지금 다시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고 있다. 

영화의 말미엔 사형을 심판 받는다. 

영화는 이 인물과 연관된 세 번의 살인을 다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세 번째 살인 

2017년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한데 

미즈미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죽음은 그저 심판(=삶)의 형식이다. 

영화의 감독처럼 진실을 뒤적이는 미즈미의 증언은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중언부언은 죽음에 대한 '결정'에 개입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즉자적인 것으로 희화화 시킨다. 

생각없는 것들!

그랬던 까닭인지 감독은, 관객의 생각으로 영화를 밀어둔다.  

말하자면 세 번째 살인은 세 번째 삶을 탄생시킨다. 

그 삶에 대해서도 영화는 명확하게 불명확하다.  


*

하지만 광고는 불친절할 틈이 없다.

불친절을 가장한 친절이 있을 수는 있다. 

수잔 손탁이 예술은 해석(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말은

광고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 더 부합한다.

그만큼 광고는 즉물적이여야하고, 

역설적으로 쉬워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처럼 관객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새우깡 집어먹듯 쉬운 몫, 하지만 고소해야겠지? 애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