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wenal's'에 해당되는 글 40

  1. 2020.01.03 Just Like a feather
  2. 2020.01.03 밤은 스마트폰을 찬미하는 시간
  3. 2020.01.02 늙음
  4. 2020.01.02 악마의 시간
  5. 2018.03.19
  6. 2018.03.18 불명확하게 명확한
  7. 2018.03.12 커피와 책
  8. 2018.03.12 사랑
  9. 2018.03.12
  10. 2018.03.12 괜찮다 괜찮다

Just Like a feather

 

라디오헤드의 유명한 노래 Creep이 있고 거기에 'Just Like a Feather'란 노랫말 있다는 건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깃털은 가벼운만큼 입어서 느낌이 좋은 것도 아실테고요. 한데 그만큼 '쉽'기도 하죠. 그래서 오리털이니 거위털이니 옷을 해입고 다닙니다. 저도 오리털 파카 하나쯤은 있습니다. 하지만 솜도 충분히 따뜻하다는 것도 알고요. 

구라파애들이 동물을 보호한답시고 아우터에 합성솜을 넣는다는 것이 과연 제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의 입장에서 고통없이, 혹은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체취한 '페더'라면 거리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외투에서 오리털이나 거위털이 빠진다고 한숨 쉬는 사람이 좀 보기 싫었습니다. 

요컨대 깃털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어떤 옷에 박혀있는 '카피' 몇 줄이 인상에 남아서 그 옷을 산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카피는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Primaloft / The Luxury Down Alternative / Look Like Down, Feels Like Down, Warm Like Down'입니다. 다운처럼 보이고 다운처럼 가벼운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진 않았습니다. 아마 요즘 나오는 프리마로프트과의 충진재들은 따뜻할 거예요.-그땐 5년전입니다.-A.P.C의 외투에도 동물의 털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따뜻할 겁니다.-아울렛에서 들은 이야기. 

사람들은 정말 깃털을 원하나요? 외투의 팔뚝이나 왼쪽 가슴에 붙은 상표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저 추위를 피하고 싶다면 애꿎은 동물의 털은 자연 속으로 그냥 소멸시켜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일론,이었나요? 노벨의 다이너마이트에 버금가는 발명품이 있었잖아요.-갑자기 프라다가 생각나네요. 2000년 여름 이태원 짝퉁 시장에서 프라다류의 바지를 한 벌 사서 입고 오다 담뱃불에 구멍이 났어요. 하루살이 프라다. 

기술로서 환경의 폐해를 회복시키겠다는 점을 비판했던 일본의 환경윤리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떠오르긴 합니다만 스마트함이란 진정 기술로서 어떤 '도리'를 지킨다는 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밤은 스마트폰을 찬미하는 시간

돌아가고 있는 것은 찰리 파커

 

밤은 스마트폰을 찬미하는 시간이다. 어떤 러시아 작가의 어법-내 맘대로 바꿔버린 어법이긴 하다.-을 빌리자면, 그렇다. 

최근부터 우리집에서 시행한 관습법-앞으로 관습이 되라는 의미에서-이 있는데 바로 스마트폰은 반드시 방 밖에서만 써야한다는 것. 즉 방 안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잠들 무렵에는 당연히 스마트해질 수 없다는 강제다. 

 

새해부터 나는 비교적 오래된 차-이것이 디젤이라 참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를 타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오래되었다곤 하지만 오래되어서 마음에 드는데다 무엇보다, 이 차에는 아날로그 즉 테이프플레이어가 내장되어 있다. 광을 뒤져 찾아낸 '퀸텟'이라든가 '스티비레이본', 또 '비틀즈앤솔로지', '건스앤로우지스' 테이프 중에서 1월 2일 출근에서는 퀸텟을 들었다. 디지 길레스피도 좋았지만 역시 찰리 파커는 말 그대로 후덜덜, 눈앞에 펼쳐진 5차선 도로에 레드벨벳을 깔아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역시 '찰리 파커'인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이 무슨 당연한-CD나 MP3로 듣는 찰리 파커는 찰리 파커가 아니다. 

사실, 찰리 파커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너무도 편리하게 활용하고 있고, 또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블루투스를 연결해 고음질 사운드를 들어대고 있으니까 말이다. 낮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밤은 역시 스마트폰을 찬미하는 시간이다. 찬미만 하라는 말이다, 사용은 하지 말고. 아이폰 11이여 영원하라! 그렇게 몇 마디면 사용한 것보다 만족도가 높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거치한'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명상을 할 수 있다. 혹은 주변에 누운 사람과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다. 잠들지 않는 밤, 잠이 다가오지 않는 밤이 몇 번은 생길 수 있겠지만 한번 잠들면 깊은 수면에 들어간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개운하다.-이 모든 결과를 고3인 내 아들이 털어놓았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거실의 스마트폰'이다. 

이 자리를 빌어, 본 관습법을 제정해주신 그녀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리고 거실에 계실 스마트폰에게도 감사. 

 

늙음

늙음,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몸이야 편하지만 심적으로 고되서 어디론가 실종될 결심을 가볍게 했었어요. 그런데 대부분 나이를 탓하더란 말입니다. 제 나이가 어때서? 라고 한다면 그건 자신에 대한 얘기일 뿐이죠. 

출장 중에 구해서 긴 시간 사용해왔던 제 볼펜을 물끄러미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장 언저리에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중인 디지털 똑딱이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지는-틀려지는 것이 아닌-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집니다. 손때 묻은 볼펜과 낡아가는 카메라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반갑고 소중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은 걸까요? 

늙어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어간다는 건, 태어날 때부터의 운명이죠. 제겐 때로 늙어간다는 건 아름다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소한 사람에게만큼 먼저 그래야한다고 생각해요. 

고장나 버리더라도 심지어 고칠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히더라도-그래서 태워지든 관 속으로 들어가든-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은, 낡아가는 것은, 기억을 묻혀가는 것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악마의 시간

문학동네 발간 :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

조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다 읽어도 감상평이 비슷할 것 같습니다. 

굉장히 수다스럽고 지적편력을 뽐냅니다만 제게는 뭔가 활로를 열어주었습니다. '생각의 활로'라고 할까요? 

제 아내의 바람대로 좋은 말만 하자면, 형식적으로 굉장히 정교합니다. 그리고 목소리, 즉 문체는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뉴스타일입니다. 그렇지만 1962년에 책이 처음 나왔네요. 저작권은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내인 베라와 그들의 아들로 추정되는 드미트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코프는 죽었다는 얘기죠. 지금이야 저작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게 인상 깊은 부분은, 아내와 자식에게 권리를 주고 떠났다는 겁니다. 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죠. 

롤리타의 작가로 유명한 나보코프의 상상력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봅니다. 나보코프의 상상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합니다. 거침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적절하게 뒤섞어버립니다. 또 상상력은 그의 박식함으로 링크됩니다. 

이 추리소설의 결론이 별로 궁금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을 작정입니다. 역시 뭔가 '활로'를 뚤어주니까요. 죽기 전에 한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그리고 인상 깊은 구절 하나 건졌습니다. 화두 같은 건데요. "고독은 악마의 시간"이라는 이야기 같은 구절입니다. 악마의 시간이란 대체 뭘까요? 설마 함정에 들게 하는 시간, 같은 의미로 쓴 것일까요? 함정에 들지 않고 견디고 버티면 되지 않나요? 그런 시간이 더 재미있지 않나요? 어쨌든 매력적인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고독이란. 

2014년






왜 슈베르트를 좋아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내게 의미있는 사람)도  좋아하겠지, 

작곡자는 슬프게 죽었어, 

어느 날 몸이 떨리게 인상 깊이 들려왔어,

그런 이유들이었을까.

곰곰 돌이켜보면 슈베르트라는

그 이름부터 좋았을 것 같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도 이름이 예쁘다.

지메르만이 최근 슈베르트의 D.960과 D.959를 음반으로 내놓았다.

보통은 지메르만 하면, '완벽'을 떠올린다.

그의 연주는, 기교가 기교처럼 들리지 않고

아름다운 음향을 거쳐 완전한 음악으로 들려온다.

한때 쇼팽의 피아노곡들이 그랬다.

어린 지메르만의 손에서 눈부시게 다시 태어났다.


그러고보면 들어보지 않아도 그의 신보를 알 것만 같다.

      약간의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일 거야.

어찌 되었던 나는 종종 그의 연주를 즐길 거고,

그의 레코드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틈이 생겨날 지도 모르고...


사드 카하트: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뿌리와이파리, 2008년 


또 다른 멋진 뮤지션인 레너드 코헨은,

      세상 만물에는 금이 가 있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고 했다.

그래,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은 '틈'에 관한 이야기다.

틈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다.


모든 사람들이 틈을 공감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틈인 것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틈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썸네일의 생동감은 틈에서 온다.

그 틈은 밤새도록 일하느라 정신이 흐릿해져 놓쳐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또 그 놓쳐버린 것을 윗사람이 수정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일 수도 있지만

틈은 왠지 미래에서 오는 선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구성과 콘티와 시안이 완벽했을 때 클라이언트는 가끔 외면한다.

그들의 억양을 흉내내 보자면,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카피 한 줄 외에는 모든 것이 틈이어도 좋겠다.

그림 한 장 외에는 모든 것이 틈이어도 좋겠다.

틈을 시도하는 것은 크리에이티브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는 말이다.





불명확하게 명확한

2018년



불명확하게 명확한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몇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미즈미는 30년 전 살인을 저지르고, 지금 다시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고 있다. 

영화의 말미엔 사형을 심판 받는다. 

영화는 이 인물과 연관된 세 번의 살인을 다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세 번째 살인 

2017년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한데 

미즈미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죽음은 그저 심판(=삶)의 형식이다. 

영화의 감독처럼 진실을 뒤적이는 미즈미의 증언은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중언부언은 죽음에 대한 '결정'에 개입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즉자적인 것으로 희화화 시킨다. 

생각없는 것들!

그랬던 까닭인지 감독은, 관객의 생각으로 영화를 밀어둔다.  

말하자면 세 번째 살인은 세 번째 삶을 탄생시킨다. 

그 삶에 대해서도 영화는 명확하게 불명확하다.  


*

하지만 광고는 불친절할 틈이 없다.

불친절을 가장한 친절이 있을 수는 있다. 

수잔 손탁이 예술은 해석(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말은

광고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 더 부합한다.

그만큼 광고는 즉물적이여야하고, 

역설적으로 쉬워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처럼 관객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새우깡 집어먹듯 쉬운 몫, 하지만 고소해야겠지? 애플처럼!








커피와 책

2009년



커피와 책



집, 커피가 떨어졌다.

낮에 사러갈까 했다.
그녀가 가기 싫다했다가
내가 초저녁에 잘 적에 와서는
살살 깨우며 커피사러가자, 했지만
내가 돌아누워버렸다.
    만감이 교차했다.
커피야, 불러봤다가
대신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다.
월드콘을 먹어보기도 했다.
급기야 위스키 한잔을 마시고.
새우를 굽고 어묵과 두부도 구웠더니
    커피가 더 그립다.


오래된 과테말라.
그녀의 친구가 사왔다는
그 과테말라를 찾은 것은
깊어가는 밤 9시 무렵이었다.
커피는 지금 완성되어 있다.
컴퓨터 옆에서 뜨겁게 김을 뿜어낸다.
나는 드디어 오늘의 커피를
한모금 마실 작정이다.


결혼을 너무 일찍했다. 

아내는 너무  시간 고생했다. 

늦게 만났으면  고생 적게 했을 텐데. 

집안일을 하거나 문화센터에 가는 때가 아니면 

 거실소파나 안방에 앉아 책을 읽는다. 

정확하게 일주일에  . 

나는, 보통은 일주일에 0. 


나는  권을 읽지 않지만 

 권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듣는 대신 나는 커피를 끓인다. 

91도가 되도록 기다려 - 무려 물을 기다리는 일이다

드리퍼를 달구고 터를 접는다. 

물방울을 떨어트린다. 

부풀어 오르는 스콘 같은 커피 속에 한두 권의 책이 있다. 


연하지만 맛있게 커피를 만드는 방법은 뻔하다. 

맛있는 부분만 가려서 물과 섞는 것이다. 

- 아이미 아내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 대해






사랑



사랑



비밀을 이런 데다 쓰면 안되는데...

내 컴퓨터들의 비밀번호는 죄다  love,라는 단어와 숫자의 조합이다.

love,라는 뜻의 amour,라는 이 영화는 어디서 봤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영화로 남았다.


Michael HanekeAmour

2012년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해 언어로 

코멘트를 시도해 보는 것에 거의 일 년이 흘렀다.

그간 나는 알렉상드르 타로(Alexandre Tharaud)가 연주한 OST를 

가끔씩 꺼내 들었다. 그러다 오늘 컴퓨터에 리핑해 넣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듣고 있다.

영화에는 단 네 개의 트랙이 흘렀다. - OST음반은 여차저차해서 9개의 트랙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두 트랙, 

베토벤의 바가텔이 한 트랙

(바가텔이 이리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그리고 결정적인 바흐의 코랄전주곡(부조니 편곡)이 한 트랙이 있었다.

Ich ruf zu dir, Herr Jesu Christ, 바흐 작품번호 639.

주여 당신을 소리쳐 부릅니다


OST의 말미에는 여주인공의 제자로 출연한 

타로와 주인공의 대화가 실려있다 .

그리고 최종의 트랙에는 부부간의 대화가 실려있다.

이 트랙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여자는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소리를 내고

남자는 뭔가를 읽어주고 있다.

6분이 넘는 분량이다.

멋진 백발을 가진 감독의 메시지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사랑의 총천연색.


작품은 거의 '집'이라는 한 공간으로 말한다. 

어둡고 눅눅한 이곳에 이자벨 위페르가 찾아와야 

조금 활기를 되찾는 그런 공간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어떤 색인지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광고라는 포맷에는 결코 담지 못하는

이런 주제의식의 영화가 있다.

So What? : 광고의 한계를 말해주는 거야.



2016년





경주에 '릉'이 있다. 

많다. 

독특한 것은 집 앞의 마당에도 

무덤이 있다는 거다. 


신민아의 대사 : 

경주에서는 릉을 보지않고 살기 힘들어요. 


장률: 경주

2014년 


장률 감독의 '경주'에서는 여러 명이 죽는다. 

첫 장면에 등장했던 모녀부터 죽는다. 

현재가 오히려 고대를 대유한다.


'경주'를 끝까지 보진 않았다. 

신민아가 커튼을 젖히는 대목 정도까지 봤다. 

영화 속이나 영화 밖이나 동일하다. 


나의 대사 : 

      삶에서는 죽음을 두지않고 견디기 힘들어요.


'경주'는 현실적이고 좋은 영화이다.


*

흔하디 흔한 이탈리아 이무지치(I Musici)의 사계를 참 좋아한다. 

많고많은 사계지만 나는 펠릭스 아요(F. Ayo)의 연주가 좋다. 

아요는 없었지만 언젠가 이무지치가 한국에 와서 사계를 연주했다. 

역시 느리지만 세부가 아름다운 연주였다. 

라디오가 중계하는 그 콘서트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몇번이고 들었다. 

막스 리히터(M. Richter)가 편곡한 버전(Version)도 아름다웠다. 

오늘 그 버전의 사계를 라디오에서 해설하는 중에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의 죽음이 알려졌다. 

소박하지만 매끄럽고 충실도 높은 그의 연주는 

아요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오후 방송에 권혁주의 연주가 전파를 탔다. 

나는 오전 내내 유튜브로 권혁주의 베토벤 협주곡을 듣고 보았다. 


*

네 개의 계절은 끊이지 않고 회귀한다. 

삶과 죽음도 회귀한다. 

삶은 한 계절일 수도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2016년 가을



괜찮다 괜찮다

제주, 2009년



괜찮다 괜찮다



바로크 음악그러니까 비발디(Vivaldi)라든가 

바흐의 협주곡은 가리지 않고 자주 듣지만 

모차르트의 것들은 대가의 연주가 아니면  듣지 않는다.

- 최근에는 SWR 레코딩 테잎으로 복각해 만든 요한나 마르치의 LP 좋았다.

오늘은 언제인가 사두었던 롤라 보베스코의 LP.

B면에 있는 모차르트 협주곡 5번을 들었다.

뒷면에 한자가 많은데 제조국은 덕국,이라 되어있다. 

- 덕국은 물론 독일이다.


Mozart: Violin Concerto #5

Lola Bobesco 


*

나는 가끔 바로크 음악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긴 시간 꽃을 피운 바로크 음악은 아마도 바흐 가문에 이르러

거대한 과실을 맛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 

고전시대 음악인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들으면서 위로 받고 있다.

위로 받을 만한 힘든 일을 겪지도 않았는데 위로 받음을 느낀다.

美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일까?

      당신 한 주 동안 한 일 말이야, 다 지난 일이야, 괜찮다구!

모차르트가 이런 말을 하는 건가? 그래서 말인데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거다.


*

언젠가 '괜찮다'라고 썼다.

(오래 세탁기 캠페인이었다.)

이건 위로의 괜찮다,였다.

그러고 나서 어떤 겨울 신문에 실린 

인용된 시의  구절에서 괜찮다,라는 것을  보았다.

거기엔 '괜찮다 괜찮다'라고 했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연달아 소리내어 읊어보았.

오늘 낮에 라디오 카피를 쓰면서

      나는 괜찮다

라고 썼다아버지의 목소리다.

(돌이켜보면 은연  나도 아이들에게 쓰고 있다.)

그리고 괜찮다 괜찮다 라고 썼다.

어머니의 딸이 어머니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당신은  괜찮다고 하니까.


'위로의 괜찮다'와 '부모의 괜찮다'가

모두 괜찮다.


*

롤라 보베스코, 루마니아 태생인데 벨기에에서 활동했다. 

그뤼미오보다 두꺼운 톤에 동향 출신인 하스킬의 비애를 지녔다

그 톤은 또, 젊어서 죽어버린 디누 리파티 타건을 닮았다. 

이야기가  새지만하스킬은  젊은 날의 위로였다.

정확하게는 실연에 대한 위로였다.

어떤 실연 끝에 나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하스킬의 모차르트를 내내 들었다.

음식을 먹지 않고 드러누워 오직 하스킬을 들었다.

모차르트를 들었다.

거의 열흘 정도를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괜찮아졌다.